차범근 독일 시절 활약 총정리 – 이혼·나이·허벅지·등번호·차두리까지

차범근 독일 시절 활약 총정리 – 이혼·나이·허벅지·등번호·차두리까지

한국 축구 역사에서 “전설”이라는 단어가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인물, 바로 차범근입니다.

오늘날과 달리 1970~1980년대에는 아시아 선수가 독일 분데스리가 주전으로 활약하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요.

하지만 차범근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실제로 걸어냈습니다.

독일 팬들은 그의 강력한 슈팅과 폭발적인 돌파력에 감탄하며 ‘차붐’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죠.

오늘은 이런 차범근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 차범근은 누구인가

(출처 : 스포츠니어스)

차범근은 1953년 5월 22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신경을 보였던 그는 이후 고려대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축구 핵심 선수로 성장하는데요.

실제로 1972년에는 10대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될 정도로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현재 차범근 나이 만 73세이지만, 그는 늘 한국 축구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데요.

참고로 그는 선수 시절에는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감독과 축구 행정, 유소년 육성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바 있습니다.

또한 국가대표 기록 역시 전설적인데요.

 A매치 130경기 56골을 기록하며 오랫동안 한국 대표팀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최연소 1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차범근 군대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출처 : 마니아타임즈)

차범근을 이야기할 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바로 군 복무 문제입니다.

그는 선수 생활 중 공군 축구단에서 복무했는데요.

1976년 공군에 입대한 차범근은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통해 1978년 말 전역 처리되며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첫 경기를 치른 직후, 군 당국은 기존의 복무 단축 약속을 철회하고 복무 기간이 5개월 더 남았음을 통보했는데요.

결국 차범근은 독일 현지에서 급히 귀국하여 남은 5개월의 군 복무를 추가로 마쳐야 했습니다.

이후 1979년 5월 31일 최종적으로 만기 전역한 그는 그제야 병역 논란을 완전히 매듭짓고 다시 독일로 돌아간 그인데요.

이렇게 그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레전드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선수들과 달리 차범근은 병역을 일찍 해결하고 유럽 진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진출, 아시아 축구의 역사를 바꾸다

(출처 : Interfootball)

1978년 차범근은 당시 서독의 다름슈타트로 진출했습니다.

지금이야 한국 선수들의 유럽 진출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아시아 선수에 대한 인식 자체가 지금과 전혀 달랐는데요.

특히 유럽에서는 아시아 선수들이 기술이나 체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죠.

그러나 차범근은 이러한 편견을 실력으로 깨뜨렸는데요.

다름슈타트를 거친 뒤 1979년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한 그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후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며 독일 무대 최정상급 공격수로 성장하게 됩니다.

‘차붐’이라는 별명이 탄생한 이유

(출처 : 세계일보)

이런 그에게 독일 팬들이 붙여준 ‘차붐(Cha Boom)’이라는 별명은 그저 이름을 변형한 것이 아닌데요.

사실은, 바로 그의 강력한 중거리 슈팅과 폭발적인 킥력에서 비롯된 별명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현지에서는 그의 슈팅이 마치 폭발음처럼 강력하다고 평가했으며, 결국 ‘차붐’이라는 애칭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이죠.

실제로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상대 수비수를 등진 상태에서 돌아서며 때리는 슈팅, 측면 돌파 후 강하게 꽂아 넣는 슈팅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참고로 선수 시절 차범근 허벅지 둘레는 25인치에 달했는데, 그의 킥력은 이런 엄청난 하체 근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유럽을 놀라게 하다

(출처 : nate 스포츠)

이런 그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활약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분데스리가 122경기에서 46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당시 리그 수준과 외국인 선수에 대한 환경을 고려하면 상당히 뛰어난 수치였죠.

다만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그저 득점 수치 때문만은 아니었는데요.

오히려 중요한 경기마다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던 점, 팀의 UEFA컵 우승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죠.

또한 독일 현지에서도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이자 구단의 전설 중 한 명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이처럼 당시 유럽 무대에서 아시아 선수가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레버쿠젠 전성기, 진정한 레전드가 되다

(출처 : 인천투데이)

이후 1983년이 되어,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의 커리어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는데요.

레버쿠젠에서 그는 185경기 52골을 기록했고, 팀 역사상 첫 UEFA컵 우승을 이끄는 핵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기록하는 등 레버쿠젠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데요.

0-2로 뒤지던 후반 36분, 차범근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천금 같은 헤더 동점골을 터뜨리며 합산 스코어 3-3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후 레버쿠젠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차범근은 이 대회에서만 4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직접 견인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레버쿠젠이 독일 강호로 자리 잡기 전, 차범근은 이미 그 클럽 역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선수였습니다.

분데스리가 통산 기록은 어느 정도였을까

(출처 : 조선일보)

이렇게 수년간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그는 통산 98골을 기록했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독일 무대 전체 기준 121골로 집계되기도 하지만, 분데스리가 정규리그 기준으로는 98골이 보다 정확하다고 볼 수 있죠.

1980년대 기준으로 외국인 공격수가 이 정도 기록을 남긴 것은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요.

더 놀라운 점은 지금도 그는 독일 축구 역사 속 가장 성공한 아시아 선수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차범근은 손흥민 등장 전까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유럽파 레전드로 평가받은 바 있습니다.

독일 시절 등번호는?

(출처 : 복희의 소소한 대화)

오랜 기간 독일 무대에서 활약했었던 만큼, 차범근은 여러 등번호를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차범근 등번호는 11번인데요.

국가대표팀과 독일 클럽 시절 모두 11번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으며, 팬들 역시 차범근을 떠올릴 때 11번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당시 유럽 축구는 현재처럼 고정 등번호 문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기나 시즌에 따라 번호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11번은 차범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번호로 남아 있습니다.

아들 차두리, 또 다른 한국 축구의 상징

(출처 : 데일리한국)

차범근의 아들인 차두리 역시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입니다.

차두리는 데뷔 초창기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격수로 기대를 모았으나, 유럽 무대에서는 한계를 느끼며 다소 정체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자신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피지컬을 풀백이라는 포지션에 접목하는 전술적 변화를 단행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는데요.

공격수 출신 특유의 과감한 오버래핑과 탄탄한 수비력을 겸비한 ‘공격형 풀백’으로 완벽히 재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차범근 차두리 부자에게 있어 흥미로운 점은 부자 모두가 독일 무대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인데요.

결국 차범근이 한국 선수 유럽 진출의 길을 개척했다면, 차두리는 그 길을 이어받아 또 다른 성공 사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범근 이혼설, 사실일까

(출처 : 미완성 인생)

차범근 차두리 부자 관계와 연관되어 인터넷에서는 종종 차범근의 이혼 여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루머로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는 오랜 기간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축구인 가정을 이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아들 차두리가 축구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가족의 지원과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전해진 바 있습니다.

결국 이들 가족은 대중의 오해와 상관없이,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를 통해 한국 축구의 진정한 ‘아이콘’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마치며

(출처 : SBS)

차범근의 축구 인생을 되짚어 보면 그저 ‘전설의 공격수’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1953년생 소년이 국가대표 에이스가 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독일로 건너가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하는 일이 쉬웠을까요?

지금 한국 선수들이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당연하게 느낀다면, 한 번쯤 차범근의 독일 시절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처음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풍경도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길의 시작점에는 언제나 차범근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글쓴이

김세훈のアバター 김세훈 7년차 풋볼리스트

안녕하세요, 경기 흐름과 선수들의 이적 움직임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축구의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김세훈입니다.
오랜 취재 경험을 통해 팀 내부의 변화, 전술 트렌드, 가십 이슈까지 사실과 해석을 균형 있게 담아내는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축구가 가진 생생한 재미를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핵심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분석과 이해하기 쉬운 해설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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